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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들

Q. 미로에는 왜 입구와 출구가 있을까요? @useful.unofficial

   첫 회사를 다닐 때였다. 공사가 다망하시고 하루의 대부분을 오지랖과 참견에 할애하는 내 사수 한대리는 단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알아서 좀 하래 놓고 왜 마음대로 했냐하고, 꼼꼼하게 하라더니 속도 좀 내라하고, 공과 사는 구분하래 놓고 정 없이 그러지 말라하고. 사회인의 문법을 채 익히지 못한 나는 이런 한대리를 마주할 때 마다 눈 앞이 깜깜해졌고 어찌할 바 몰랐다. 이리봐도 벽, 저리봐도 막다른 길 같았다. 미로에 빠진 사람처럼 제자리를 맴돌거나 확신없이 땅만 보고 걷거나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가거나 했고 때론 주저 앉아 울기도 했다. 대학 졸업과 취업 사이 일 년 반 남짓을 방황하고 시작된 회사생활이었다. 막막한 미로를 겨우 탈출해 당분간은 헤멤없이, 장애물 없이 직선주행 할 수 있을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더 복잡하고 독하고 악랄한 미로의 입구에 들어와버린 것 같았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탈출하듯 퇴사했다. 다시는 미로에 빠지지 않길, 내 발로 미로에 들어서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첫 회사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회사 모두 경영악화로 각각 8개월, 10개월 만에 퇴사 당했다. 테마와 장르, 퀘스트의 구성을 달리한 미로에서 미로로 환승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무엇도 마음같지 않았고 예상할 수도 없었다. 직선주행에 대한 기대는 멀어졌고 계속해서 울퉁불퉁한 모퉁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회사에 입사한지 만 5년 3개월이 됐다. 세 번째 회사가 위태로워지면서 쫓겨나지 않으려 서둘러 옮긴 회사였다. 이어가야 하는 생계 탓에 겨울나기만 하자며 들어온 회사가 사회생활 기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주요 커리어가 되어버렸다. 기대도 포부도 없었다. 당분간 꾀병을 부리게 되더라도 자리보전하자 했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시작한 회사생활은 예상치 못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연봉을 인상받는 기회를 만났다. 또 회사가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는 행운도 만났다. 연봉이 오르고 재택근무를 했다고 해서 아무 어려움도 불만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회사에 머무는 동안 생겨난 시간적, 육체적, 경제적 여유를 감사하게 즐겨왔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 이 여유의 끝이 어렴풋이 보였다.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는 한심한 동료들 뿐인 회사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이사님이 회사를 그만 둘 것이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퇴사할 거라고 말은 해놨다.”
    “헐, 이사님 그만두실 때 꼭 말씀해주세요. 저도 그만 둘거에요. 근데 언제쯤으로 생각하세요?”
    “일단 올 해는 지나고 봐야지. 근데 너는 왜 그만둘려고”
    “지금까지 다닌 것도 이사님 때문이에요. 이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아침까지만 해도 루틴한 일상에 안도해 하면서도 지루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는데 오후가 되니 입장이, 상황이 달라져버렸다. 오랜만에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설 선물로 깡통 햄으로 꽉찬 선물세트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몇 번이나 손을 바꿔 들었다. 걸음에 채이는 커다랗고 묵직한 짐이었다. 무게에 짓눌려 양 손에 빨갛고 하얀 줄이 새겨졌다. 머리 속도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도착해서 짐을 내려 놓으니 양 손은 가벼워졌지만 머리 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현관에 선물세트를 그대로 둔 채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었다. 복잡한 생각들을 싸안고 이불 속에 누웠다. 연차 대비 빈약한 커리어에 대한 자각, 이제는 모두 잊어버린 출퇴근의 감각, 어렵고 복잡한 인간관계 같은 생각들이 동시에 몰아닥쳤다. 그리고 그 불안감에 약을 처방하듯 잡코리아에 접속했다. 몇몇 회사의 모집공고를 읽고 직무관련 강의를 찾아보고 일정과 커리큘럼과 수강료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분명히 퇴사하게 된다면 무조건 놀고 쉬고 여행하리라 꿈꿔왔으면서 커리어를 재정비하고 업그레이드 할 생각에 바빴다. 이런 나 자신이 어이 없었지만 한 번 시작된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은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깨어질 일상과 적응해야 할 새 것들이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결국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공들여 한 눈화장이 번지고 떨어져나온 마스카라 가루가 눈을 찔렀다.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눈과 코 끝이 빨개진 꼴이 황당했다. ‘어리광도 정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동실의 얼음을 모두 털어놓고 시원한 차를 만들어 마셨다. 창문을 열었고 대충 벗어 놓은 외투를 옷장에 걸었다. 현관에 덩그러니 놓았던 선물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찬장에 깡통 햄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깡통 햄을 감각하자 허상에 가까운 불안들은 사라지고 생각은 단순해 졌다. 행운에 가까운 이 미로에 머물 수 있는 시간 동안 내가 견지할 태도가 분명해졌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도 있는 이 여유를 두려움과 걱정으로 소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며칠 째 고민만 하던 소설쓰기 수업을 결제했다.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라는 말처럼 미로의 끝을 알고나니 미로 속에 머무는 여정에 의미가 생겼다. 온 힘을 다해 재밌게 사는 것이 이 여정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울음을 터트린 방금 전의 내가 창피해진다. 이 죽일 놈의 자기연민. 부끄럽다.



#화요일의쓸모 #글쓰기 #질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