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옥, 백성 민(民)에 구슬 옥(玉). 내 이름이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한 달간을 옥편과 씨름하며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만 철학관에서 돈을 주고 받아 왔다는 오빠 민석의 이름과 ‘민’자 돌림을 같이 하면서 ‘석’자가 가진 질감의 결을 따라가려 끼워맞춘 이름이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이렇다 할 뜻 없는 단출한 획수의 한자로 만들어진 이름은 학창시절 한문으로 이름쓰기 숙제를 할 때 막힘없이 써낼 수 있었다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던 격동의 1996년에 나는 4학년이었는데 학교는 스스로의 명칭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의 개명을 돕기 위해(아마도 행정적인 편의를 돕기 위해) 단체 개명 신청을 받았다. 용식, 철순, 지숙을 이름으로 가진 아이들이 개명신청을 했고 나도 이참에 개명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했다. 유라, 지혜, 아라, 예지, 주현, 재희, 재인, 상희, 상미, 정현, 지수 같은 친구들 혹은 사촌들의 이름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내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며 자랐고 용식, 철순, 지숙이 개명을 하는 데 굳이 민옥을 고수하는 건 세련으로 향하는 시류를 거스르는 것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속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채 삼켜졌다. 작은 밥상 위에 옥편과 노트를 나란히 펴놓고 정성들여 내 이름에 쓰일 한자를 고르는 아빠의 모습이 상상되었고 그렇게 지어진 이름을 바꾸려 하는 건 아빠를 슬프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확인 할 수 없는 정성과 성의없게 느껴지는 결론 사이에서 갈등하다 어영부영 신청기간이 지나고 나는 별 수 없이 민옥으로 남았다.
계속해서 민옥으로 살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었다. 정성들여 지어진 게 분명한 이름들 앞에서 늘 주눅이 들곤 했다. 소세지 반찬이 그득한 친구의 도시락 앞에 콩자반 도시락을 내미는 기분이랄까. 내 부모의 무심함과 그 무심함의 원인인 가난이 명찰에 새겨져 매일 같이 비교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새롬, 아름, 나래, 슬기 같은 한글 이름도 부러웠지만 흔하지 않는 한자 조합의 이름이 더 크게 자극됐다. 그 중 지금까지도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이름은 은조. 정은조. 은주, 은지, 은영, 은정, 은미도 아니고 은조.
빛나는 하늘을 유영하듯 나는 작은 새가 연상되고 마는 이름. 은조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뭘 더 설명할 것 없는 그냥 같은 반 애였다. 잊어버렸다 해도 그만인 정도의 이름을 나는 여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싸이월드 파도타기를 통해 그 애의 대학생활을 지켜보는 게 일과였던 시절이 있다. 활동적인 대학생활, 어른 남자친구와 즐기는 뮤지컬, 성숙한 유니폼을 입고 하는 아르바이트,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떠나는 해외여행과 어학연수. 벅차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 애의 일상이 부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애가 이렇게 멋지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부모가 애정과 사랑과 좋은 뜻을 담아준 이름이 있기 때문이라고. ‘은조’라는 이름은 좋은 연료를 가득 채운 날개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겐 ‘은조’만큼의 날개가 되어줄 이름이 없다는 것에 맥없이 슬퍼지곤 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은조’만큼의 예쁜 이름이 아니어서 서운하진 않다. 여전히 내 이름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 이름보다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다 괜찮다. 그리고 비록 성의없어 보이는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건 ‘은조’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분명히 알고있다. 이제는 옥편을 펼쳐놓고 한 달을 고심한 아빠의 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조금 내 이름을 좋아해 볼 때가 된 것같다.
#화요일의쓸모 #글쓰기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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